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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사랑

아침이면 창문을 통해 텃밭을 내다보면 흐뭇하다. 더디기는 해도 가지가 달렸다. 오이도 여러 개 따 먹었는데 앞으로도 따 먹을 만한 오이가 줄줄이 차례를 기다린다. 어제 호박 세 개를 따냈다. 내일 두 개 따면 그다음엔 뜸할 것이다. 토마토도 달렸다. 방울토마토가 아직은 파랗지만, 곧 많이 달렸다. 나는 호박, 오이, 가지, 토마토를 따면서 내 자신 야박하다는 마음이 든다. 각각 식물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종자를 많이 번식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여 겨우 익어갈 만하면 내가 싹둑 따버리니 헛수고만 한 게 된다. 다시 새롭게 시작해서 열심히 종자 만들기에 전념한다. 열매를 따면서도 미안한 이유이다. 그런가 하면 식물이라고 해서 바보가 아니다. 내 딴에는 매일 들춰보고 어디에 딸만 한 과실이 있는지 눈여겨보다가..

문학 2022.08.13

시들시들한 토마토 식물

6월에 심은 토마토 모종이 어른 무릎만큼 자란 다음 갑자기 시들어갔다. 물이 부족해서 그러나 하고 물을 많이 주었으나 점점 더 비실비실 시들기만 했다. 노인이 사는 집 실내 화초는 다 죽는다는 말이 있다. 노인은 하는 일이 없으니까 화초에 물만 준다. 물을 너무 많이 줘서 화초가 죽는다는 거다. 내가 토마토 식물에 물을 너무 많이 줘서 그런가 하고 며칠 물을 주지 않았다. 이제는 그만 완전히 시들고 말았다. 물 때문은 아닌 것 같고 병충해가 왔나보다 했다. 다시 토마토 모종을 사다 심었다. 한동안 잘 자랐다. 어른 무릎만큼 자란 다음에 역시 시들기 시작했다. 이번엔 병충해를 의심하고 아무리 살펴보고 관리해도 점점 시들어만 갔다. 뭐! 건강이 약이지 별것 있나 하는 생각에 닭똥을 한 삽 떠서 토마토 식물 ..

카테고리 없음 2022.08.11

천국으로 변한 한국 시리즈 1

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면 한국은 또 다른 외국 같다. 이민 연조가 깊어지면서 한국이 또 하나의 외국처럼 된 사람에게도 한국은 여전히 그립다. 고향이기 때문일 것이다. 막상 가서 보면 각자 세상 살기에 바빠서 누구 하나 내게 신경 써주는 사람 없다. 그러면서도 미국에서 사는 한인들은 끊임없이 한국을 그리워한다. 1995년 ‘재미없는 천국, 재미있는 지옥’이란 에세이집을 낸 여류시인이 있다. 여기서 천국은 미국이고 지옥은 한국이다. 오래전에 미주 한국일보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칼럼을 썼던 작가다. 최근에 남편이 노환으로 죽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살던 집을 다 팔고 한국으로 이주했다. 미국에서 산 지도 거의 60년이 다 돼가는데 지금이라도 한국에 가겠다면서 미국에서 같이 지내던 친지들과 고별 파티까지 열고..

한국 2022.08.10

나는 윤석열 후보를 직어줬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나는 윤 후보를 찍었다. 나만 찍은 게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 여럿에게도 윤 후보를 찍으라고 선전도 했다. 윤 후보가 정치를 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 후보인 이 후보는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될 사람 같아서 그랬다. 생각해 보라.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 해도, 디지털 시대라고 해도, 아직도 대한민국은 유교적 사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형수님에게 욕을 한다는 것은 패륜이나 마찬가지이다. 형수님한테도 욕하는 사람이 누구한테는 못하겠는가? 이 후보를 제쳐놓으면 찍을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해서 윤 후보에게 점수를 줘야 하는데 그에게 줄 만한 점수는 공정과 상식밖엔 없었다. 사실 그가 가장 공정하고 정의로운 것도 사실이었고. 막상 대통령이 되고..

한국 2022.08.08

탈북자

불법으로 국경을 넘은 밀입국자들을 멕시코로 돌려 보내고 있다.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미국행에 나선 중남미 등 출신의 이민자들이 바다와 육지에서 잇따라 숨지는 비극이 이어지고 있다. 푸에르토리코 인근 해역에서는 밀입국자 5명이 익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방 해안경비대에 따르면 밀입국 알선업자는 이날 푸에르토리코 서쪽의 무인도인 모나섬 해역에서 불법 이민자들을 강제로 하선시켰고 이 과정에서 5명이 바다에 빠져 숨졌다. 알선업자 브로커가 돈만 받아먹고 무인도에다가 내려놓고 도망가 버린 거다. 해안경비대는 밀입국자들을 태운 보트에서 미성년자 2명을 포함해 남성 41명과 여성 25명 등 모두 66명을 구조했다. 중미 니카라과에선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바람에 미국 밀입국을 시도하던 베네..

한국 2022.08.06

누구를 위한 인터넷인가?

격세지감을 느낀다. 1969년 10월 어느 날, 을지로 입구 롯데호텔 맛은 편에 있는 미 대사관에 인터뷰하러 들어갔다. 미국인 영사가 자기 방으로 불러드려 악수를 청하면서 미국에 이민 가는 사람 인터뷰는 처음이라면서 매우 반가워했다. 친지들이 설이나 쇠고 가라고 해서 양력설일망정 만둣국을 먹었다. 그때는 미국에 가는 사람이 우리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5살, 6살 먹은 여자아이 자매를 보호자 없이 보내면서 우리에게 부탁도 했다. 1970년 1월 4일 내가 한국을 떠난 날이다. 무척 추워서 모두 오버코트를 입었다. 얼음이 얼고 눈이 쌓여 있는 김포공항 입구에는 택시 승차장이 있었고 우리를 배웅나온 친지들과 친구들로 가득했다. 내가 아는 친구들은 모두 나왔다. 심지어 군에 나..

미국 2022.08.04

매와 비둘기

비둘기는 사람과 가장 친숙한 새다. 애완동물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과 가까운 거리에서 같이 공생한다. 문제는 비둘기의 배설물이다. 비둘기도 먹고살려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온종일 먹고 싸는 일만한다. 새는 소변을 눋지 않는 동물이어서 하루에도 여러 차례 대변을 배설한다. 새의 배설물은 산성으로 매우 독해서 웬만한 페인트는 변색되기도 하고 콘크리트에는 배설물 자국이 영원이 남을 수도 있다. 자동차에 새의 배설물이 떨어지면 제때 닥아 버려야지 그냥 놔뒀다가는 자동차 도색이 변하는 수가 있다. 비둘기의 배설물은 한마디로 말해서 골치 거리다. 건물이나 기념동상 주변에 비둘기가 서식하면 배설물 치우는 미화원의 수고가 갑절로 늘어난다. 골치를 썩이기 마련이다. 샌프란시스코 지역 야외 전철역에는 어김없이 비둘기들이..

미국 2022.08.02

미국 최초의 한국인 이름으로 명명된 6차선 대교

추수감사절이라는 큰 명절에 배를 굶주리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앵커리지의 한 주유소의 한국인 주인은 추수감사절에 배고픈 사람에게 칠면조 점심을 나눠주었다. 백인숙(71) 씨는 고픈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그녀는 한국전쟁 때 한국에서 자랐고, 그녀의 가족은 항상 먹을 게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먹을 게 넘쳐나는 세상이다. 백씨는 알래스카주 앵커리지 마운틴뷰 인근 쉘 주유소의 붐비는 편의점에서 수백 개가 넘는 무료 급식을 한다. 10년 동안 백씨는 추수감사절마다 가게에서 칠면조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그녀는 이웃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돌려주고 싶고,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싶다고 말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으니 이제는 나눠주어야 한..

미국 2022.07.30

다시 가서 자세히 보고 싶은 명화들

그러니까 그게 아주 오래전의 여행이었다. 나와 아내가 젊었을 때의 어느 날이었으니. 유명한 트라팔가 투어(Trafalgar Tours)을 통해서 16일간 유럽을 다녀왔다. 로마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플로렌스를 거처 알프스산맥을 넘고 스위스로 해서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로 향했다. 지금도 몇 가지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파리에서의 일이다. 그룹이라고 해봐야 열댓 명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의사 부부와 아이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흑인 부부, 시카고에서 온 미국인 할머니 두 분. 그날 저녁은 샹데리에 거리를 여행하고 밤에 캉캉 쇼를 보는 거로 되어 있었다. 시카고에서 온 노인 부부는 나가지 않고 방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 고단해서 따라다니기 싫단다. 팔순을 넘긴 할머니들은 가는 ..

화랑 2022.07.28

미국은 한국보다 살기에 수월하다

나는 26살에 미국에 이민 가게 되었다. 26살이란 나이에서 3년이라는 군복무를 빼면 실제로 한국에서 살아보겠다고 진지하게 덤벼들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짧은 기간 한국에서 살아봤고 나머지는 모두 미국에서만 살았다. 사실 20대라는 시대는 어떻게 앞날을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이다. 내가 한국에서 보낸 20대는 1960년대를 말한다. 살아갈 앞날이 캄캄하고 답답했을 뿐이다. 남들은 나보다 몇 배는 더 똑똑한 사람들 뿐이어서 내 실력으로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벽이 너무 높아서 넘을 수가 없어 보였다. 고생하면서 바닥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이 지금은 그때보다 살기 좋아졌다고는 해도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속내의 갈등은..

미국 2022.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