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역전 드라마가 이만하랴?
원래 야구는 축구하고 달라서 나 할 일 다 하면서 힐끔힐끔 보아도 다 따라가면서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있는 게 야구다.
오후 6시 반부터 한국과 도미니카 야구 중계가 있다고 해서 기다렸다.
이번 경기에서 한국은 도미니카를 꼭 이여야지, 만일 도미니카에게 지기라도 한다면
보따리 싸 들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처지다.
한국 야구팀도 각오가 남달랐으리라는 건 뻔하지만, 도미니카 팀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가난한 중남미 나라들은 미국 메이저 리그에 가서 뛰는 선수가 나오면
이것은 국가적 명예이며 그 선수는 영웅 대접을 받는다.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같은 중남미 국가들은 국민이 우리와는 달리 국가라는
개념이 희박해서 멕시코와 합병하면 잘살 것 같으면 합병도 불사했다가 결과가 좋지 않으면
다시 독립하는 식이다.
국민이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겠다면 미국 국경까지 걸어오는 난민들이 속출하는
이유도 가난 때문이다. 중남미 국가들이 가난한 까닭은 부정부패와 갱단의 마약 유통이
근본 원인이라고 한다. 누구라도 재산이 좀 있으면 경비원을 고용하지 않으면 목숨이
붙어나지 못하는 나라들이다.
이런 나라에서 축구하고 야구는 국기나 마찬가지다.
야구를 잘해서 미국 메이저리그에 뽑히기라도 하면 국가에 영웅이 나타났다고 난리법석이다.
내가 수년 전에 중남미에 갔을 때도 투어 가이드는 자기네 나라 출신 메이저 야구 선수들을
빼놓지 않고 자랑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얼마나 선망의 대상인지 알 수 있었다.
이번 올림픽 야구팀에도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뛰었던 선수 내지는 현재 뛰고 있는 선수가
3명이나 섞여 있었다.
한국팀은 1회초 선발 투수 이의리가 2연속 안타를 허용하고 폭투까지 던지면서
먼저 한 점을 내줬다. 이후 세 타자를 모두 잡아내면서 추가 실점하지 않았다.
한국팀은 1회 말 연속 안타와 볼넷으로 무사 만루 기회를 잡았고, 양의지의 우익수
희생플라이로 1-1 동점을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이었고 그다음부터는 코스타리카에게 끌려가기만 했다.
이의리가 4회 2점 홈런을 얻어맞으면서 1-3으로 뒤진 다음에도 위기만 맞았지
이렇다 할 득점 기회는 오지 않았다.
혹시나, 혹시나 하면서 기다려도 기회는 오지 않았고 오히려 위기만 겨우, 겨우 모면하는
답답함으로 이어졌다.
희망의 7회를 무득점으로 넘기면서 희망은 점점 실망으로 다가갔다.
8회, 9회까지 가는 동안 무려 3시간 30분 동안 지루하도록 한국팀이 끌려가는 모습은
참아 보기 싫었다.
하지만 야구는 투아웃부터라고 했던가?
마지막 9회에, 그것도 2아웃에 가서 극적인 장면이 벌어졌다.
한국팀은 1-3으로 뒤진 9회 말 대타 최주환의 내야 안타로 기회를 잡았다.
대주자 김혜성이 도루에 성공하면서 무사 2루를 만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미니카 팀은
설마 역전패야 당하겠나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피쳐를 바꾸지 않았다.
나 역시 기회는 기회이지만 그렇다고 판이 뒤집힐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팀의 박해민가 좌중간 적시타로 한 점을 만회해 2-3을 만들었다.
이어진 1사 2루에서 이정후가 좌익선상을 가르는 2루타로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여
3-3 동점이 됐다. 이쯤 되면 도미니카 감독은 피처를 갈아치웠어야 하는데 안일하게 그냥
있는 거다.
드디어 한국팀은 양의지의 희생타로 2사 3루를 만들었고, 김현수가 우익수 키를 넘기는
끝내기 적시타를 치면서 대역전승을 거뒀다.
나는 보다 말고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어느 역전 드라마가 이만하랴. 천금을 주고도 보지 못할 대역전 드라마가 벌어진 밤이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통쾌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