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모발 성장 촉진제

샌프란시스코 메아리 2021. 8. 23. 12:46

 

샤워하다가 찌꺼기를 걸러내는 하수구 덮개를 보았다.

머리카락이 잔뜩 모여있다. 걷어내서 버린 게 한 주먹은 된다.

걷어 버린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또다시 빠진 머리가 한 옴큼이다.

무슨 머리가 맥없이 빠지는가.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머리가 빠지는 걸 볼 때마다 내가 늙어가는 모습을 확인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서글프다.

이러다가 머리가 다 빠지면 그날이 마지막 날이 될 것처럼 느껴진다.

삼손처럼.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누군가? 전화 걸어올 사람이 없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전화기를 귀에다가 댔다.

안녕하셨어요, 고객님. 모발 성장 촉진제 문의하셨지요?”

상냥한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덜컥 겁이 났다. 이 여자, 내가 머리 걱정하는 걸 어떻게 알고 전화를 걸지?

귀신에게 홀렸나? 했다.

우리 회사 제품은요…….”

하면서 설명하는 거로 봐서 이거 세일즈 전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거 문의한 적 없는데요.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더는 필요 없는 전화 같아서 끊어버렸다.

 

다음 날 미국에서 사는 친구한테서 문자가 왔다.

모발 성장 촉진제를 사려고 전화해 놓았으니 미국에 올 때 가져다 달란다.

! 어제 왔던 전화가 그 전화였던가?

나는 얼른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면서 이미 전화가 왔었는데 끊어버렸다는 것과

다시 연락해서 내게 전화를 걸게 하면 잘 받아주겠다고 했다.

다음 날 친구한테서 온 문자는 내가 부탁도 안 들어주는 염치없는 사람으로 몰고 갔다.

친구는 아무리 인터넷을 들춰봐도 어디에서 보고 연락했었는지 못 찾겠단다.

그러면서 다시 찾을 수도 없고, 전화도 끊어버린 거로 봐서 사지 말라는 뜻인 것 같다면서

포기하기로 했단다.

나는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부인 잃은 친구가 외로워서 어떻게 살려나 했었는데 최근에 애인이 생겼다.

애인에게 잘 보이려면 머리숱이라도 많아야 할 것이다.

모발 성장 촉진제에 관심을 둘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미안하기도 하고 머리가 자꾸 빠지는 것 때문에

고민하는 사정을 이해할 것도 같아서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을 말해 주었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을 때면 이발사가 잊지 않고 한마디 했다.

머리가 자꾸 빠지는데 얼마 못 가서 다 빠지게 생겼어요.“

나는 은근히 걱정됐지만 그렇다고 어디다 대놓고 물어볼다고 해서 해결 될 일이 아니다.

고민 끝에 피부과 전문의를 만나보았다.

전문의는 바르는 모발 약은 효과가 없고, 먹는 약은 분명히 머리가 난단다.

그러면서 어느 약이나 부작용이 있기 마련인데, 발모 약은 머리는 나오는데 남성 호르몬을

억제하기 때문에 정력이 떨어진다고 했다.

약을 먹다가 끊으면 다시 머리가 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왕성한 머리카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약을 계속해서 복용해야 한다.

약을 먹어서 머리가 왕성했다가 약을 끊으면 우수수 빠져나갈 때의 그 허탈한 심정을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이런 약을 누가 먹느냐고 물어보았다. 대머리 총각이 결혼하려고 먹는단다.

나는 대머리도 아닌데 결국 약 먹기를 포기했다.

친구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친구라고 별수 있나. 정력이 감소한다는데 그래도 먹을 리 만무하다.

예전에 내가 모발 촉진제 먹기를 포기했던 것처럼 친구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