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반지

샌프란시스코 메아리 2021. 8. 25. 14:18

백과사전에서 반지는 몸을 치장하는 장신구이면서 권위·충성의 상징, 사회적인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2짝의 고리로 되어 있는 것은 가락지라 하고,

1짝으로 된 것을 반지라고 부른다고 쓰여 있다.

그러니까 반지란 외짝 자리를 말한다.

 

한번은 강남 신사동 제일 생명 근처에서 토건업을 하던 친구를 만나러 갔었다.

친구와 마주 앉았는데 친구는 왼쪽 팔목에 묵직한 롤렉스 시계를 차고 있었다.

나의 시선은 롤렉스 시계를 지나 내려오다가 그의 손가락에서 멈추었다.

다이아몬드가 여러 개 박힌 큼지막한 반지가 그의 약지에서 번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친구에게 부탁하러 간 것도 아닌데 은근히 주눅이 들면서 기가 죽어갔다.

손에 만 장식을 한 게 아니라 목걸이까지 하고 있는데, 이건 연예인도 아니고 나이깨나 먹은 친구가

여기저기 보석을 달고 있는 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슬쩍 물어보았다.

너 차고 있는 보석만 해도 돈깨나 나가겠다.”

, 이거 얼마 안 돼. 사업을 하자면 이런 식으로라도 돈 냄새를 풍겨야 걸려든다니까.”

나는 무엇이 걸려드는지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토건업을 하자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거로

알아들었다.

 

나도 자식을 길러봐서 아는 건데 자식 중에는 자랑스러운 자식이 있는가 하면 자랑스럽지는 못해도

효자 노릇을 하는 자식도 있다.

나는 자랑스러운 자식을 길러보지 못해서 자랑스러운 자식을 두면 어떤지 알지 못한다.

나의 장인어른은 자식이 일곱인데 그중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둘째 아들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직접 대놓고 말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들의 육사 졸업 반지를 장인어른이 직접 끼고

다니셨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우면 그러했을까 내 나름대로 짐작할 따름이다.

하기야 나도 아들이 버클리 대학교에 다닐 때 쓰고 다니던 칼 로고가 그려진 야구 모자를

지금껏 쓰고 있으니…….

 

나의 조카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성적이 우수해서 버클리 대학교 공과대학 토목과에 합격했는데도

안 가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설득하느라고 한동안 애를 태웠다.

안 가겠다는 이유는 간단했다.

남들에게 좋은 대학교에 다닌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가는 대학은 싫다는 것이다.

자기는 초급대학을 졸업한 다음 소방관이 되겠다고 우겼다.

결국은 내가 나서서 버클리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 싫으면 다시 소방관이 될 수는 있어도

소방관이 됐다가 다시 버클리 대학 공대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 주고 나서

겨우 설득시켰다.

세월이 흘러 대학을 졸업한 조카는 캘리포니아 교통국에서 근무한다.

여러 대학 출신들이 함께 근무하는 직장에서 파티가 있는 날에는 졸업 반지를 꺼내 끼고

나간다. 반지를 끼고 나가는 조카를 보면 자신이 버클리 공대 출신이라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건 오래된 이야기지만 나는 의정부에서 카투사로 근무했다.

내가 일등병일 때 중대 서무계로 근무했는데 우리 중대에 카투사가 삼십여 명이 넘었다.

평균 매달 한 사람 정도가 제대했다.

한번은 보급소에서 근무하던 경상도 시골 출신인 강 병장의 제대가 다가왔다.

강 병장이 카투사 모두 데이 룸에 모아놓고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제대해서 떠나는 병장에게 금반지 선물을 주자는 것이었다.

카투사들은 부자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일로 푼돈을 챙기는 나름대로

소스가 있었다.

카투사 30여 명이 돈을 모아 떠나는 병장에게 닷 돈짜리 금반지를 선물로 주면 이것이

계 타는 식이어서 결국 모두 받게 된다는 것이다. 언뜻 듣기에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자기는 한 푼도 내지 않고 받아 가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참 병장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어 반대할 용기를 가진 병사는 없었다.

결국 일은 강 병장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었다.

그때부터 제대해 가는 병장에게 닷 돈짜리 금반지가 자동으로 끼워지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리기보다는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쌈짓돈을 끌러놓았다.

하지만 이발사 최 일병은 푼돈이 생길 구멍이 없었다. 거기에다가 일찌감치 장가는 들어서

어린 딸도 있었다. 아내가 딸을 데리고 면회라도 오면 외박 좀 내보내 달라고 내게 사정했다.

주말에 외출은 돼도 외박은 5명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병으로서 외박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내가 제대 말년이 되었다. 나는 차마 닷 돈짜리 금반지를 받아 끼고 나갈 수가 없었다.

최 일병 한 달 봉급이 지금 돈으로 치면 5천 원인데 그것을 꼬깃꼬깃 모았다가 면회 오는 아내에게

전해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 금반지 내 놓으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것은 사병 갈취와 같은 불법행위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데이 룸에 병사들을 모아놓고 제대 병장 금반지 선물은 없는 것으로 한다고 선언했다.

앞으로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제대 후, 세월이 흐른 뒤에 병동 오양 다방에서 경복고 출신 이 병장을 만났다.

내가 떠난 뒤에 금반지 사건은 어떻게 되어갔는지 물어보았다.

모두 환영하고 흐지부지 사라졌단다.

 

나는 평생 반지라는 걸 손가락에 끼어보지 못했다.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나의 빈 손가락을 볼 때마다 참 보기 좋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