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의 비밀

교수님은 창작과 비평사로부터 의뢰받은 해설을 쓰기 위해 월남 작가 바오닌의 작품
‘물결의 비밀’을 받아들고 전철을 탔다.
작품이 너무 단출해서 전철 안에서 읽고 그만 멍했다고 한다.
그 후, 며칠 동안 머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나는 강의 듣기 전에 피뜩 읽었다. 이 짧은 글도 소설인가? 했다.
반박에 느낌이 오지 않았다.
강의를 듣고 교수님이 멍할 정도의 작품이라니? 그런 것도 같고…….
작품을 필사했다. 필사하고 다시 읽었다. 감동이 두 곱으로 다가왔다.
아닌 게 아니라 플롯이 탄탄하다. 생략을 거듭 거듭하고 농축액만 남긴 작품이다.
A4 용지 한 장 반짜리 소설로 감명을 줄 수 있는 글을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작품의 분량이 길고 짧고는 한국 문단에서 그 분량을 요구하기에 생겨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결의 비밀
바오닝(월남)
강물은 시간처럼 흐르고, 시간처럼 강물 위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던가.
그 어느 때보다 밤이면 내 고향 강물은, 그 표면은 셀 수 없이 많은 신비한 반점들로, 내 생애 은밀한 비밀들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해 칠월 보름날 밤, 홍수로 물리 가득 찬 바로 그 순간, 미군의 일제 폭격이 우리 마을 앞을 지키던 제방을 겨냥했다. 폭격기의 굉음과 잇단 폭음이 멈추자 강물이 제방을 무너뜨리고 들판을 덮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며 요란하게 이어졌다.
나는 경비초소에서 마을로 달렸다. 그날 오후 아내의 해산 소식을 들었지만 나는 초소를 떠날 수가 없었다. 이제 하늘도 땅도 무너져버렸고,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아내와 자식뿐이었다. 나는 내 평생의 힘을 모두 두 다리에 실었다. 뒤로는 대홍수가 내 발꿈치를 따라왔다.
물은 이미 마을을 덮쳤다. 나는 집에 돌아가 가까스로 아내를 지붕 위로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우리 부부가 올라앉은 초가지붕이 시커먼 어둠 속으로 휩쓸려 떠내려갔다. 초가지붕이 막 조각나려 할 때, 신의 도움으로 마을 사당 앞 보리수나무 줄기에 걸렸다. 이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뭇가지마다 매달려 있었다. 아내와 나를 나무에 오르게 하려고 수많은 손이 뻗어왔다. 아내는 갓난아이를 품에 끌어안고 한사코 내게 주지 않았다.
“아들…… 아들인데…… 안심해요. 아들이니…… 내가 안고 있을게요. 당신은 찬찬치도 못하면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비가 퍼붓고, 바람이 거셌다. 물이 더 불어나지는 않았지만, 물살은 더욱더 급해졌다. 보리수나무 가지에는 더 많은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기진맥진했다. 한 손으로는 아내를 껴안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꽉 붙잡고 있었다. 아내는 흠뻑 젖어 바들바들 떨며 탈진해갔다.
아침이 가까워져 올 즈음, 우리 부부가 매달린 나뭇가지 바로 아래에서 갑자기 물이 요동쳤다. 허우적거리며 거의 질식해가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려주세요…… 살려…… 어이…….”
귀신의 손처럼 차갑고 미끈거리는 손바닥 하나가 늘어진 내 다리를 스쳤다. 나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여인의 손은 그대로 미끄러져 떨어져 물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보리수 나뭇가지가 심하게 흔들리며 딱딱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 아내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더니 “첨벙”, 내 아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갓난아이가 어미의 손에 들려 있던 비닐 포대에서 미끄러져 어두운 물속으로 떨어졌다.
“내 아기!”
아내가 고함을 지르며 바로 아이를 구하러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도 따라서 뛰어들었다. 물은 차갑고, 진흙이 섞여 거무칙칙했다. 깊게 빨아들이며, 강하게 휘감겼다. 나는 아이를 붙잡아 황급히 끌어올려 아래로 뻗은 어떤 손에 건네주고는 다시 아내를 끌어내기 위해 잠수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도우려고 뛰어내렸다.
내가 깨어났을 때, 날은 이미 밝았고 비도 그쳐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찬 구조선 위에 누워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미친 듯이 코로 귀로 피를 내 뿜으며 죽기 살기로 사람 잡는 물과 싸웠지만 결국 지고 말았다. 나는 아내를 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시신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군대의 거룻배가 다가왔을 때, 사람들은 나를 물에서 억지로 떼어내려 애를 썼다. 나는 기운이 다해 기절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깨어났다. 눈물이 솟구치고 비통했다. 한 여자가 사람을 밀치며 내게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녀의 운명이 그런 거예요. 그만하고 이제 맘을 다잡아야죠. 기운을 차려야 아이를 키울 것 아녜요. 하느님의 도움으로 당신의 아이를 구했어요. 맙소사, 세상에 첫울음을 건네자마자 어휴, 그 끔찍한 일을 다 겪었네. 이 아기를 좀 보세요.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네. 젖 먹고 실컷 주무시더니 오줌을 쌌네. 착한 것…… 어이구, 녀석 아주 흠뻑도 싸놓았네.”
그녀는 아기를 어르며, 내 아이를 감싸고 있던 담요를 서서히 풀었다. 그리고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나는 그저 바라보았다. 순간 나는 까무러치게 놀라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가까스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눌렀다.
“내 아기…….”
나는 담요로 아이를 감싸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르고, 물도 흐르고, 나는 이제 나이가 들었고, 내 딸은 소녀가 되었다. 딸은 물의 아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불렀다. 물에 빠진 아기를 아비가 구해낸 이야기는 마을 사람이면 누구나 알았다. 그러나 그 비밀은 아무도 몰랐다. 내 딸조차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강물만이 안다.
내가 둑에 나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다. 내 아내, 내 아이, 그리고 이름 모를 여인이 늘 강바닥에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시간, 세월은 그렇게 흘렀고, 강물도 역사도 모두 변해간다. 그러나 내 생의 아픔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아픔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