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창작

주말 연속 소설 '탁란'

샌프란시스코 메아리 2021. 10. 10. 06:00

7.

작지만 붉은 장미 다발을 들고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현아를 기다렸다.

현아는 오른손으로는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을 끌고, 왼손으로는 네 살 먹은 아이 손을 잡고 걸어 나왔다.

마중 나온 사람들의 눈길이 내게로 집중되는 것 같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현아에게 꽃다발을 안겨주고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이는 철수라고 했다. 철수와 악수하고 번쩍 들어 안았다. 철수는 얼굴과 목덜미,

손등에 부스럼이 심했다. 나면서부터 아토피로 고생 중이란다. 고생도 고생 나름이지,

가려운 걸 못 긁게 하느라고 매일 전쟁이란다.

집에는 스티브와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스티브는 엄마를 처음 본다.

계면쩍은지 얼굴이 빨개지면서 몸을 비비 꼬며 할머니 뒤로 숨어버렸다.

현아가 다가가 껴안고 한참을 더듬었으나 어색함을 달래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해 보였다.

스티브 역시 엄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자꾸 몸을 뒤틀며 내 뒤로 숨으려 들었다.

동생이라고 소개받은 철수와 스티브는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애들은 핏줄이 잡아당기는 것처럼

금세 친해졌고 잘 놀았다. 철수는 스티브를 따라가겠다고 해서 할머니와 함께

머데스토 농장으로 갔다.

 

현아는 짐을 풀어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워킹크로젯으로 걸어 들어가 오른쪽에

걸려 있는 내 옷들을 보여 주면서 비어있는 왼쪽에 현아 옷들을 걸어놓으라고 옷걸이

여러 개를 건네주었다. 현아는 받아 든 옷걸이는 내팽개쳐놓고 옷을 침대 위에 그대로

꺼내 늘어놓았다. 내가 나서서 옷을 정리해 넣어야만 했다.

세면대에 가 보아도 어지럽기는 매한가지다.

미셸에게 현아의 생활습관을 알려 주고 현아를 따라다니면서 치워 주라고 입력해 두었다.

미셸은 고분고분히 하라는 대로 따랐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철수는 스티브와 같이 먹고 붙어 지냈다. 엄마를 찾지도 않았다.

사랑에 굶주린 강아지처럼 형 스티브의 품으로 기어들었고 따라다녔다.

스티브가 학교에 가면 문 앞에 앉아서 올 때까지 기다렸다.

톰슨 어머니의 사랑이 자상하고 너그러워 철수가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현아는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냉정한 건지, 애정도, 그리움도 없는

건지 자기 행복에만 몰두하는 여자처럼 보였다. 오히려 보채던 아이가 떨어져 나가 시원한

것처럼 홀가분해 했다. 멤버들만 드나드는 니만 마커스에서 명품 핸드백에 선글라스,

목걸이까지 사들였다. 현아는 미국에 살러 온 게 아니라 여행으로 잠시 방문한 사람 같은

인상을 풍겼다.

저녁에는 늘 술을 마셨고 술을 마셔야 잠이 온다고 했다.

현아는 방을 어지르는 데 소질이 있어 보였다. 미셸이 따라다니면서 치워도 못 당하리만치

여기저기 늘어놓고 다녔다.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현관문 앞에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면

미셸은 얼른 집어 신발장에 넣었다. 현아가 침대에서 늦게 일어나 화장실로 가면 미셸은

기다렸다는 듯이 쪼르르 달려가 침대를 정돈했다. 현아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옷을 벗어놓으면 집어서 옷장에 걸어놓고 부엌에서 음식이라도 먹으려고 움직이다가

그릇이 흩어져 있으면 미셸은 곧바로 설거지하고 제자리에 넣었다.

하다못해 TV를 켜느라고 리모트 컨트롤을 들고 채널을 고르다가 놓으면 쪼르르 달려와

리모트 컨트롤을 제자리에 꽂아 놓았다.

현아는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미셸 때문에 못 살 것 같다고 했다.

로봇하고 싸울 수도 없고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현아 말은 듣지 않았다.

짜증스럽다면서 미셸을 따돌릴 방법을 물어보기에 나처럼 미셸이 할 일이 없게끔 먼저

정리 정돈을 하면 미셸이 따라오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현아는 말 안 듣는 미셸보다

미셸 편을 드는 나를 더 미워했다. 다시 신으려고 잠깐 벗어놓은 양말조차 미셸이 집어다가

세탁기에 넣는 바람에 더는 참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미국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현아는 결혼 신고부터 확실히 하자고 덤볐다.

평생 같이 살 건데 결혼 신고가 뭐 그리 급할 것도 없건만 고집을 부렸다.

철수도 학교에 등록해야 하고 자신도 영주권을 받아야 한국에 다녀올 수 있다면서

결혼 신고를 조급하게 서둘렀다. 아무 때 해도 해야 할 결혼 신고인데 기왕이면 현아가

원할 때 해 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결혼 신고를 하기 전에 해 둬야 할 일이 있었다.

야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혼전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혼전 계약서는 결혼 생활 시 규칙, 이혼 시 재산 분할에 관한 규정이다.

어렵지만 현아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면서 이해를 구했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어서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혼을 전제로 해서 써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혼 생활을 성실하고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효율적 장치에 불과하다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현아는 염려했던 대로 이혼을 전제로 결혼할 것이냐고 화부터 냈다.

사랑과 돈이 반대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계산하면서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현아에게서 그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 예상은 했으나 반응은 예상보다 거칠었다.

그래도 내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다. 현아가 훌쩍 떠나버리던 때의 당혹스럽고 참담했던

심정을 잊을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훌훌 털어버렸을 법도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결혼에 앞서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행복은 단순해서 믿는 만큼만 이루어진다. 이십 대 때는 오직 사랑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혼전 계약서를 어떻게 쓸 건데?

현아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쏘아보면서 말했다. 그녀의 깐깐한 목소리가 따져보자는 투다.

5년 안에 이혼하게 되면 지금 상태 그대로 헤어지기로 하고.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발끈하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 그러면 나는 빈털터리로 돌아가란 말 아니야? 그것도 다 늙은 다음에…….

현아는 기가 찬 듯 뚫어지게 나를 쏘아보더니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사랑은 자유로운 거야. 난 계약서 따위에 얽매이고 싶진 않아.

맞아, 사랑은 자유로운 거야. 엄마 말에 휘둘리지 않을 때 자유로워지는 거야. 네 영혼을 찾았으면 해.

현아더러 영혼을 찾으라고 했지만 진작 현아는 알아차리는 것 같지 않았다.

계약서 문제로 며칠이 흘렀다. 혼전 계약서가 없으면 캘리포니아 이혼법은 하루를 살았건,

이틀을 살았건 부부 재산은 반반씩 나눠야 한다.

현아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만 믿고 사느냐면서 때로는 사랑보다 돈을 더 믿는다며

나를 설득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사업을 하면서 터득한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불확실성을 피하는 것이다.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현아는 엄마와 빈번히 화상통화를 해 댔다.

한번 통화하기 시작하면 한 시간, 두 시간, 끝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기다리다 못해 혼자 방에 들어가 잠들어 버린 적도 많다.

현아는 자기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일도 엄마가 결정해 주길 바랐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판단에 방해가 되었던지 현아는 엄마를 불러들였다.

현아 엄마는 현아를 보자마자 얼굴이 왜 이렇게 안 됐느냐면서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서울에서 잘 가꾸고 예쁘게 치장하던 딸이 이렇게 살고 있으니 속이 상한다면서 제대로 된

미용실에 가서 머리라도 하자며 데리고 나갔다.

아닌 게 아니라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돌아온 현아는 훨씬 예쁘게 보였다.

현아 엄마는 얼토당토않게 나를 붙들고 은혜도 모르는 괘씸한 사람이라고 나무랐다.

느닷없이 은혜라니?

궁금증은 곧 풀렸다. 유명한 작명가가 김민수라는 좋은 이름을 지어주는 바람에

그 운세를 타고 성공을 이룬 것이라고 했다.

아직도 현아 엄마는 운세라는 운명론에 사로잡혀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현아는 마음 편히 행복하게 살아야지, 이혼당할까 봐 초조해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면서 믿을 수 없는 게

남자란다. 현아의 저 말도 제 엄마에게서 들은 소리임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