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35

텃밭 사랑

아침이면 창문을 통해 텃밭을 내다보면 흐뭇하다. 더디기는 해도 가지가 달렸다. 오이도 여러 개 따 먹었는데 앞으로도 따 먹을 만한 오이가 줄줄이 차례를 기다린다. 어제 호박 세 개를 따냈다. 내일 두 개 따면 그다음엔 뜸할 것이다. 토마토도 달렸다. 방울토마토가 아직은 파랗지만, 곧 많이 달렸다. 나는 호박, 오이, 가지, 토마토를 따면서 내 자신 야박하다는 마음이 든다. 각각 식물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종자를 많이 번식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여 겨우 익어갈 만하면 내가 싹둑 따버리니 헛수고만 한 게 된다. 다시 새롭게 시작해서 열심히 종자 만들기에 전념한다. 열매를 따면서도 미안한 이유이다. 그런가 하면 식물이라고 해서 바보가 아니다. 내 딴에는 매일 들춰보고 어디에 딸만 한 과실이 있는지 눈여겨보다가..

문학 2022.08.13

몰입이 주는 행복

몰입이 주는 행복(幸福) 행복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한 상태’라고 쓰여있다. 나는 사전의 해석에 공감한다. 영어에서는 행복을 어떻게 해석하며 한문은 또 어떤가. 1) happiness, hapless, perhaps, happenstance는 각기 다른 뜻을 가진 단어지만, 어원상 모두 다 친척 관계다. 모두 다 ‘hap(우연)’에서 나온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의 본질은 우연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행복에 매우 중요하다. 2) 幸福은 (幸)다행 행자에 (福)복 복자를 쓴다. 행(幸)은 다행의 준말로 운이 좋다는 뜻이다. 그러면 다행은 무슨 뜻인가? ‘多幸은 뜻밖에 일이 잘되어 운이 좋음’이라고 쓰여있다. 복(福)은 편안하고 만족한 상태와 그에 따른 기쁨, 좋은 ..

문학 2022.07.16

'내가 본 것을 당신이 알게 됐으면‘

탈북 인권운동가인 여대생 박연미(22)씨가 시애틀에서 유린당하고 있는 북한 인권문제와 탈북자들에 대해 한인들과 미국인들이 큰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국제적으로 북한 인권문제를 규탄하고 있는 미모의 탈북 여대생으로 유명한 그녀는 2007년 탈북 해 동국대학교에 다니다 이번에 콜럼비아 대학에서 공부 중이다. 이날 박연미씨는 2015년에 발간한 자서전 ‘In Order to Live a North Korean girl’s Journey to Freedom‘ (한국어 판: 내가 본 것을 당신이 알게 됐으면’)이란 주제로 자신이 겪은 북한의 처참한 실상과 인권 유린에 대한 이야기를 한국어로 강연했다. 이어서 영어로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다. 그녀의 간증에 따르면 그녀는 북한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났으며 부모와..

문학 2022.07.05

소년은 알고 싶다

‘소년은 알고 싶다’ 심사평 소설가 전경애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도 많은 분들이 훌륭한 작품을 보내주셨다. 절묘한 묘사가 눈에 띄는 우수한 작품들이 많아 작품 선정에 어려움이 많았다. 제출된 작품 중에서 소설의 본질에 충실하고 완성도가 높은 장편 소설 ‘소년은 알고 싶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소년은 알고 싶다’는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의 아픔을 담담하게 승화시켜 소설화한 작품이다. ‘한 인간의 삶 속엔 역사가 녹아있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소설이다. 주인공인 ‘나’는 한국전쟁 후 미국에 이민하여 큰 성공을 거두지만 평생 어머니를 그리며 잠을 못 이룬다. 그러나 성공한 미국인으로 변신한 후에도 주인공은 평생 그를 버리고 가출한 어머니의 비밀을 캐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 비밀을 알고 난 순간 그것..

문학 2022.06.30

넝쿨손의 비밀

넝쿨손은 가지나 잎에서 실같이 벋어나가 다른 물체에 감기기도 하고 땅바닥으로 퍼지기도 하여 줄기를 지탱하게 하는 가는 덩굴이다. 나는 넝쿨 식물을 관찰하면서 한 가지 신비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넝쿨손이 있는 식물은 여러 가지이겠으나 그중에서 호박이 대표 주자다. 무겁고 듬직한 열매를 매달고 있으려면 넝쿨손도 든든해야 한다. 호박은 마디에서 넝쿨손은 뻗어내는데 넝쿨손은 반드시 세 가닥으로 나온다. 가장 긴 넝쿨손이 어른 손 한 뼘보다 조금 더 길게 뻗고 두 번째 넝쿨손은 그 보자 조금 짧다. 세 번째 넝쿨손이 가장 짧다. 가장 긴 넝쿨손이 길게 뻗어나와 사물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허공을 휘졌는다. 휘졌다가 어떤 물체가 잡히면 여지없이 휘감아 단단하게 묶어놓는다. 그리고 줄기가 흔들리지 않게 붙들면서 여유..

문학 2022.06.28

운수 좋은 날

모처럼 멀리 오클랜드에 있는 크고 오래된 중앙 도서관에 갔다. 중앙 도서관은 다운타운에 있으니 주차가 문제다. 주차비를 지불 하더라도 주차장에 세울까 하다가 혹시 길거리 틈새 파킹이 있을지도 몰라서 일단은 둘러보기로 했다. 길거리 파킹이라고 해서 거저는 아니고 미터기에 돈을 넣어야 하지만 그래도 찾아보기로 하고 몇 블록을 돌아보는데 빈자리가 눈에 띈다. 내 눈을 의심했다. 잘못 본 게 아닌가 하고 다시 훑어보았다. 분명히 차를 댈 수 있는 빈자리다. 그것도 커다란 가로수 밑이어서 그늘진 곳으로……. 돈 한 푼 내지 않아도 되는 빈자리가 남아있다니…… 나는 길에 떨어진 임자 없는 돈을 발견한 것처럼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생각에 일단 차를 대고 봤다. 이렇게 훌륭한 자리가 내 차례에 오다니 운수 좋은 날이구..

문학 2022.06.16

향내(香-) 나는 사람

지난 겨울이었다. 출입국 사무소가 있는 경기도 양주에 전철을 타고 간 일이 있다. 겨울철인 데다가 서울을 벗어났더니 전철이 텅 비었다. 드문드문 몇 사람 없었다. 초라한 중늙은이가 들어와서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앉자마자 냄새가 났다. 그냥 냄새가 아니라 코를 찌를 듯한 지독한 냄새다. 노숙자 같은데 아마 일 년은 목욕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사람들이 슬슬 일어나더니 다른 칸으로 가버렸다. 나도 일어나 가고 싶었지만, 앞에 앉아 있는 노숙자가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도 같고, 기분 나빠 할 것도 같아서 그냥 참고 있었다. 하지만 그 냄새는 가히 참아줄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나도 일어나기로 마음먹었는데 그가 먼저 일어나 내리는 바람에 나는 그냥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의..

문학 2022.06.09

텃밭의 비밀

넓은 집에서 두 사람이 산지도 오래 됐다. 두 사람만 빼고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바쁜 터라 별일 없는지 들여다보는 사람도 없다. 오는 사람도 없는 집이라서 남에게 구애받지 않고 우리가 좋은 대로 꾸미고 산다. 페밀리룸 창가를 카페 창가처럼 꾸몄다. 두 사람만 앉는 작은 테이블을 놓았다. 식사는 작은 테이블에서 한다. 카페같은 창가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면 곧바로 텃밭이 보인다. 가지며 방울토마토, 부추에 오이, 호박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사랑스러운 채소들과 늘 눈 맞춤을 즐긴다. 채소를 심어놓고 싹이 트고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아는 사람만 아는 쏠쏠한 재미다. 노인이 있는 집안 화초는 다 죽는다고 했다. 할 일없는 노인이 매일 물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 집 텃밭의 채소들이야말로 다 죽게 생겼다...

문학 2022.05.17

일곱 고갯길(seven hills drive)

딸이 한동네에서 산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고도 행복하다. 그동안 다 잊고 살던 것들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바쁘게도 만든다. 딸은 아들 하나뿐인데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제 엄마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손주도 다닌다. 그동안 시간이 많이 흘렀다. 학교 건물은 그대로이지만 선생님들은 모두 바뀌었고 교무실도 다른 건물로 옮겨 앉았다. 그렇지만 주차장이며 학교가 파하면 봉사자들이 나와서 건너가는 길에서 교통 정리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딸이 다니던 때에도 축제가 있어서 온갖 게임도 하고 발표회도 열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바쁜 와중에도 아이를 학교에 실어나르던 추억이 서린 학교다. 은퇴한 지금. 나는 손주가 학교 수업을 끝내고 집에 오는 시간에 맞춰. 딸네 집에서 손주를 기다리는 일이..

문학 2022.05.12

첵에 사인해 주면서

매년 1월이면 정기검진을 받는다. 정기검진이라고 해 봐야 주치의 닥터 앤더슨 얼굴이나 보고 뭐 이상이 있느냐? 하고 묻는 정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코로나19 때문에 작년에는 정기검진도 피했기 때문에 2년 만에 받는 진료다. 오히려 혈압은 좋아졌고 아픈 데도 없다. 다만 걸을 때나 일어서면 뒤꿈치 발바닥이 아프다. 젊어서도 경험해 본 증세여서 왜 그런지 어떤 치료가 있는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병원 정문에 직원 한 사람이 지키고 앉아 있다가 마스크 안 쓴 사람이 들어오면 마스크 한 장씩 나눠주면서 쓰란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직원이나 볼 일이 있어서 들른 사람이나 마스크 안 쓴 사람이 없다. 오래간만에 만나보는 닥터 앤더슨은 중무장한 상태였다. 마스크를 쓰고 얼굴은 페이스 쉴드로 가렸다. 발..

문학 2022.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