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시상식도 줌으로 대신 한다.

샌프란시스코 메아리 2021. 7. 19. 06:30

한국일보 문예 시상식이 목요일 오전 11시라고 했다.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줌으로 한단다.

나는 일주일 전부터 준비했다. 머리가 길어도 깎지 않았다.

머리숱이 많아야 그나마 늙은 티가 덜 날 것 같아서다.

줌에 얼굴이 나갈 터인데, 조금이라도 젊게 보여야 한다.

머리 하얀 노인이 젊은 사장에게서 상을 받는 건 보기에 좀 그렇다.

머리 염색부터 했다. 머리를 헤어드라이어로 잘 빗어넘기고

수염도 깨끗이 밀었다.

셔츠도 색깔 있는 거로 골라 입었다.

화면에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차렸다.

일찌감치 컴퓨터 앞에 앉아 줌 주소를 클릭했다.

 

미주 한국일보 김 위원이 email로 줌 주소를 두 개나 보내왔다.

하나는 수상자들이 클릭해서 들어오라는 주소이고

다른 하나는 친지들이 지켜볼 수 있게 아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 주소이다.

나는 하라는 대로 수상자 주소를 클릭하고 들어갔다.

평상시와는 달리 줌 화면이 뜨지를 않고 내 얼굴만 나온다.

아직 11시가 되려면 15분이나 남았으니까 마음 푹 놓고 기다렸다.

시상식 준비하느라고 줌 창을 열지 않아서 그러나 보다 하고 기다렸다.

아내와 둘이서 노닥이면서…….

 

내 책상에는 컴퓨터가 두 대나 있다.

하나는 10년이 훨씬 넘은 데스크탑 컴퓨터이고 다른 하나는 재작년에 구입한

노트북 컴퓨터다.

오늘도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노트북 컴퓨터를 켜놓고 몇 시간 작업하던 중이었다.

노트북은 늘 켜있는 상태였다. 어제도 그제도.

11시가 지났는데도 줌 화면에는 변화가 없다.

시상식이 늦어지나? 아니면 벌써 진행하는데 나만 못 들어가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들어서 LA 미주 한국일보 김 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받는 김 위원의 목소리가 비밀을 말할 때처럼 가늘고 조용히 말한다.

우리는 신 선생님을 다 보고 있는데 신 선생님은 소리가 안 들리나 보지요?

컴퓨터 오른쪽 하단 오디에 들어가서 클릭해 보세요.”

이게 무슨 소리야? 벌써 시작했다고? 아내와 내가 떠드는 소리가 다 새 나갔다고?

내 얼굴을 보고 있다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내는 그것도 모르고 내 곁에 서서 이것저것 참견이다.

나는 얼른 아내더러 조용히 하라고 손가락을 입에 대고 했다.

저쪽에서는 우리가 하는 말이 다 들린다고 알려주는데, 내 노트북에서 줌 화면이 뜨지 않으니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줌 화면이 뜨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저것 주무르다가 다시 김 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시간은 말없이 흘러 1139분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김 위원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김 위원이 컴퓨터를 꺾다가 다시 켜면 되는데,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려서

시상식이 끝날 것 같단다.

 

나는 얼른 오래된 데스크탑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를 켜고 줌을 클릭했다.

오래된 데스크탑 컴퓨터는 모니터에 카메라 렌즈가 없어서 내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내 목소리도 나가지 못한다.

하지만 줌 화면과 소리는 잘 들린다.

줌 화면에서 한국일보 사장의 마지막 멘트가 들린다.

한국일보 미주 본사가 지난 1979년 창간 10주년 기념으로 시작한 문예 공모전은 40년 넘게

이어져 오며 한인 이민 문학이 꽃피우는 데 크게 기여한 한인사회 최고의 연례 문예 행사로,

올해 시상식도 팬데믹의 여파 속에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온라인으로 진행한다며

미 전역과 캐나다 등에서 많은 수상자와 가족, 지인들이 참가해 그 의미를 더한다고 말했다.

상장을 보여주면서 수상자에게 보내드릴 것이라는 말도 했다.

줌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손뼉 치며 시상식을 끝냈다.

나의 박수 소리는 시상식에 모인 사람들이 치는 박수 소리와 합쳐지지 못했다.

 

내가 왜 진작 시상식이 시작되기 전에 노트북 컴퓨터를 껐다가 다시 켜지 못했는지

하는 생각에 후회막급이다.

바보스럽게 내가 줌에 등장해서 다른 사람과는 달리 딴청을 부리면서 엉뚱한 소리를 해댔을 것을

생각하면 화도 나고 창피하기도 하다.

남들 앞에서 개그를 연출했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어지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온종일 하는 일 없이 분()을 삭이지 못해 끙끙거리다가 이발소로 달려갔다.

이발사 부인에게 엊그제 후리몬트 은행에서 얻어온 반년이나 지나버린 새 수첩과 볼펜을

건네주면서 예약 손님 적으라고 했다.

이발사 부인은 기분이 좋아서 몇 번이고 고맙다고 한다.

머리 깎으면서 웃기는 소리나 주고받았더니 오전에 속상했던 기분이 다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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